마법의 스크린_영화&드라마

때로는 사랑을 눈으로 들을 수 있다_영화 <청설>

연금술사 J 2024. 11. 11. 23:32

지난주 토요일 친구들과 영화 <청설>을 보고 왔다. 홍경, 노윤서, 김민주 세 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탓에 이 셋을 영화에서 본 건 청설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홍경 배우는 완전 초면인데, 최근에 런닝맨 출연했을 때 보였던 어리숙한 모습 때문에 외국인 배우인 줄 알았다. 한국말을 아직 잘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영화 시작에서 한국말을 너무 잘하길래 한국말을 왜 이렇게 잘하지? 했는데 끝나고 찾아보니 대한민국 출생이었다😂

각설하고, 청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학 졸업 후 취준생 용준(홍경)은 도시락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 가게에서 배달 심부름을 하고 있다. 동네 수영장으로 배달을 간 어느 날, 그곳에서 여름(노윤서)을 본 용준은 첫 눈에 반한다. 마침 여름은 아르바이트가 있어 자리를 떠나고 용준은 남은 사람들에게 여름에 대해 묻는다. 이때 용준은 수영장에 가자마자 여름과 다른 사람들이 수화로 대화하는 것을 보고 수영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 때도 수화로 말을 건다. 수영을 하고 있던 가을(김민주)에게 여름에 대해 묻자 자신의 언니라는 답이 돌아온다. 여름의 전화번호를 묻는 용준에게 가을은 직접 물어보라는 답을 하고, 용준은 다음을 기약하고 떠나는데 몇 시간 뒤 골목에서 여름과 마주친다.

여름은 갑자기 고장난 스쿠터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고, 급히 가야하는 여름에게 용준은 자신의 스쿠터를 빌려주고 여름의 스쿠터는 고쳐놓는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친구를 하게 된다. 용준이 보는 여름은 쉼이 없는 사람 같다. 수영 선수를 준비하는 동생 가을에 맞춰 여름의 시간은 흘러간다. 하루는 용준이 여름, 가을을 불러내 함께 놀러간다. 그들 사이의 대화는 수화로만 이루어지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오는 설렘, 일탈의 즐거움 등 감정을 나누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용준의 관심과 노력으로 여름도 용준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면서 둘 사이는 가까워졌다. 정확히는 가까워지는 듯 했다. 용준과 여름이 단 둘이 만나 놀게 된 날,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 잠이 든 가을은 매캐한 연기에 잠에서 깬다. 탈출을 하려던 가을은 엘레베이터에 갇히게 되고 기절한 상태로 병원에 이송된다. 

한편, 용준은 여름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기로 한다. 그때 가을의 소식을 들은 여름은 용준의 고백을 끝내 듣지 못한 채 가을에게 간다. 여름은 자신이 용준을 만나러 간 사이에 가을이 이렇게 된 거라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곤 용준을 피하기 시작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용준은 여름에게 무슨 일인지 계속 연락하고, 여름을 찾아가지만 여름과는 연락조차 닿지 못한다. 가을은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퇴원하지만, 후유증으로 인해 예전처럼 수영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그러나 언니인 여름이 자신을 걱정할까 두려워 데리러 오지 말라고 하는 등 여름과의 교류를 피한다. 그러나 여름은 바로 가을에 대한 관심을 끊어내지 못한다. 계속해서 자신을 걱정어린 눈으로 보며 주위를 맴도는 여름에게 가을은 언니의 꿈은 대체 무엇인지 묻는다. 동시에 자신의 꿈은 자신의 것이지 언니의 것이 아니라고 얘기하며 자신의 꿈이 언니의 꿈이 되어버린 것이 부담된다고 이야기한다. 가을의 말에 충격 먹은 여름은 용준과의 관계도 완전히 정리하고, 지방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간다. 

여름은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상대가 먼저 손 내밀기 전에 나서서 다 해주려고 하는 것은 동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가을이를 믿고 한 걸음 떨어져서 응원해주기로 한다. 또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보기로 한다. 용준은 귀마개를 끼고 시끄러운 거리를 거니는 등 여름과 가을의 불편함을 몸소 느껴보고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한다. 수영장을 찾아갔다가 혼자 물 속에서 사색에 잠긴 여름의 뒷모습을 보며 용준은 과거 자신의 무지로부터 비롯됐을지 모르는 무례함에 대해 사과하고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고백한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여름에게 자신의 부모님의 가게에서 함께 아르바이트를 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한다.

용준은 부모님께 여름이 농인이라고 미리 얘기를 해두고, 부모님은 나름대로 여름에 대한 배려로 스케치북에 적은 글씨를 보여주며 대화를 한다. 그런데 이제껏 말을 못하는 줄 알았던 여름이 대답을 했다. 알고보니 가을을 포함한 여름의 가족들은 모두 농인이고 여름에게만 장애가 없었던 것이었다. 여름은 용준이 처음 본 순간부터 수화로 말을 걸어와 오히려 용준이 말을 못 듣는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들은 작은 해프닝을 웃어 넘긴 후 처음으로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마음을 나눈다. 


주인공들이 영화의 후반까지 말 없이 수화로 대화를 하기 때문에 영화의 배경음악, 주변 소음 등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됐다. 영화 속 인물들은 반대로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서로의 눈을 더 바라보고, 입 대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손에 더 주목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사랑이 꼭 말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됐다. 가을에게서 언니 인생을 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여름의 표정이, 그런 말을 하는 가을의 표정이 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눈빛 속에서 서로를 향한 애정이 짙게 느껴졌다. 또 여름을 떠올릴 때의 용준의 표정, 지칠대로 지쳐서 자신을 밀어내는 여름을 바라볼 때의 용준의 상처받은 눈빛 속의 감정 또한 온전히 느껴졌다. 

신선했다. 눈빛만으로도 다양한 감정이 전달되는 것이. 말로 표현해야만 전달될 수 있다고 느꼈던 사랑과 같은 감정들이 눈으로, 수화라는 또 다른 언어로 전달되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장면들이 몇 장면 있는데, 그 중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여름이 용준에게 수화로 친구하자고 말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장면과 가을이 여름에게 내 꿈이 왜 언니 꿈이냐고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가을을 챙기는 것이 유일한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여름은 누군가 자신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을이 해외 대회에 나가게 되는 것'처럼 가을과 관련된 꿈을 이야기 했다. 이처럼 여름의 삶은 어느 순간부터 가을의 삶에 귀속되어 있었다. 그런 여름을 가을의 언니가 아닌 여름으로 바라봐준 사람이 용준이다. 용준과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가을에게 소홀해지는 것만 같은 자신의 모습에 여름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여름은 용준과의 만남, 가을의 슬럼프를 거치며 점차 자신을 마주하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져갔고, 나는 여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된 후로도 쭉 부모님으로부터 동생을 챙길 것을 강요 받아왔다. 나에게도 주어진 과업이 있는데, 그것보다도 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우선시하길 바라셨다. 그렇게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삶을 살다보니 어느 순간 나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탐색할 시간이 없었고, 막상 내 길을 선택해야 할 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지 막막했다. 가을의 말처럼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다. 타인의 꿈이 내 꿈이 될 수 없고, 내 꿈이 또한 타인의 것이 될 수 없다. 부모님께도 내심 이 말이 너무 하고 싶었다. 원치 않는 타인의 도움은 동정이 되고, 부담이 된다. 공부할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나의 도움은 동생들에게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였겠지. 타인의 성취가 내 꿈이 되어버릴 때, 꿈의 실현에 내가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다. 반대로 누군가 나의 꿈을 곧 자신의 꿈이라 얘기할 때에는 기쁨보다도 부담이 훨씬 크게 느껴진다. 전자에서는 시도에 대한 무력함을 주로 느낀다면, 후자에서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도조차 잘 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꿈에 인생을 건 언니의 기대를 충족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슬럼프를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가을도, 슬럼프를 겪는 가을의 모습을 보며 할 수 있는 게 없어 괴로워하던 여름도 모두 공감됐다. 내 자신이 여름이기도, 가을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러나 각자 자신의 꿈을 찾아 나아가는 세 주인공처럼 나도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꿈을 찾아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꼭 귀로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는 영화 속 이야기를 마음에 새긴다.